Page 25 - 정형외과 소식지 388호-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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宜城亭侯(의성정후)에 봉했다. 유비는 전한 경제의 아들 中山靖王(중상정왕) 劉勝(유승)의 후예로 항렬을 따져 보니 헌제의
            아저씨뻘이 된다. 이때부터 헌제는 유비를 皇叔(황숙)이라 불렀다. 물론 헌제는 조조의 전횡이 두려워 믿을 만한 사람을 옆에
            두고 싶었던 것이다.
            어느 날 조조가 황제를 모시고 사냥을 나갔을 때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도 동행했다. 그때 사슴 한 마리가 나타나자 헌제는
            조조에게 황제의 활(寶雕弓:보조궁)과 화살(金鈚箭:금비전)을 내주며 쏘도록 했다. 조조는 그 화살로 사슴을 잡았다. 군사들이
            사슴을 가지러 가서 보니 황제의 화살인 금비전이 꽂혀 있어서 황제가 쏜 줄 알고 환호를 울렸는데, 이때 조조가 황제의 앞을
            가로막고 자신이 환호에 응답하였다. 조조의 이런 오만하고 무례한 행동을 멀리서 지켜본 관우가 분노하며 칼을 들어 조조를
            죽이려 하자 유비는 급히 말렸다. 그날의 사냥에서 돌아온 관우는 유비에게 까닭을 물었다. 그러자 유비는‘쥐를 잡으려다
            독을 깰까 염려되어 그랬네(投鼠忌器:투서기기). 만약 자네가 한때의 의분을 이기지 못하고 칼로 조조를 죽이려다 황제께
            해를 입히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조조와 황제와의 거리가 한 자 밖에 안 떨어져 있었는데 일이 잘못되면 큰 변이 생겼을
            것이네.’라고 말했다. 관우의 실력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만에 하나 소동이 일어나 황제에게 해가 돌아갈까 염려해 말린                                     25
            것이다. 투서기기(投鼠忌器)란 돌을 던져 쥐를 잡으려다 곁에 있는 독을 깨뜨린다는 뜻이다. 즉 의도와는 달리 다른 피해를
            입는다는 뜻이고 독을 깰 우려가 있으므로 차라리 쥐를 그대로 두라는 말이다. 이 성어는 이 때로부터 400년 전 賈誼(가의)가
            漢文帝(한문제)에게 한 임금 곁의 간신을 제거하려 해도 임금에게 누가 미칠까 두려워한다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정
                                                                                                                   형
            賈生(가생)은 이름이 誼(의)고 낙양 사람이다. 18세 때 시를 외고 글을 짓는데 능숙하여 온 고을 안에 유명했다. 그러한                                   외
            소문과 여러 사람들의 천거로 한문제는 가의를 불러 박사를 삼았다. 그때 가의의 나이 20세로 박사들 가운데 가장 어렸다.                                    과
                                                                                                                   학
            그때 천자가 내리는 조칙 명령 등의 議案(의안)에 대한 자문이 있을 때에는 여러 노 선배들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가의가
                                                                                                                   회
            대답하곤 하였는데 그것은 사람마다 그렇게 했으면 하고 원하는 바 있어도 말로 잘 표현하지 못한 의견이었기 때문에 여러
                                                                                                                   소
            선생들은 도저히 가의를 따를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한문제는 기뻐하여 차례를 뛰어넘어 가의를 승진시키니 가의는 일 년 안에                                    식
            태중대부에 이르렀다. 가의는 한나라가 일어나서부터 문제에 이르기까지 20여 년을 경과하고 천하는 평화스럽게 다스려져
            백성들이 화합하여 있으므로 당연히 曆書(역서)를 고치고 관복의 색깔을 바꾸며 制度(제도)를 바르게 하고 관명을 정하고
            예악을 흥성케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 것들에 대한 의례와 법도의 초안을 기안했는데 문제는 감연히 이
            모든 법령을 개정하고 열후로 하여금 수도인 장안에 거하지 말고 다 각자의 영지로 돌아가게 했다. 이리하여 문제는 여러
            신하들과 의론하여 가의를 公卿(공경)의 지위에 올릴만하다고 했다. 그런데 주발, 관영 장상여 풍경 등 원로대신들이 모두
            가의를 싫어하여 ‘저 낙양의 사나이는 나이도 어리고 학문을 한 것도  얼마 되지 않으면서 멋대로 권력을 휘두르며 모든 일을
            문란하게 만든다.’라고 비방했다. 이에 천자도 후에는 가의를 멀리하여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게 됐다. 그 후 장사왕의
            태부로 임명됐다. 가의는 친지들과 하직하고 가면서 장사는 땅이 낮고 습해서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좌천되어 가는 길이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 후 4년여에 다시 소환되어 문제를 뵈었다. 그리고 문제는 가의와 밤이
            늦도록 담론을 했다.‘나는 오랫동안 가의를 만나지 못하였다. 내 자신 가의보다 낫다고 생각했더니 이제 만나고 보니 나는
            가의에 미치지 못하겠다.’라고 했다. 그 후 얼마 아니 되어 가의를 양회왕의 태부로 임명했다. 양회왕은 문제의 막내아들로
            문제의 총애를 받는 데다가 글 읽기를 좋아했다. 그런 까닭에 가의를 그의 태부로 삼은 것이다. 문제는 또 회남왕 유장의 세
            아들을 봉하여 모두 열후에 삼았다. 그러자 가생은 ‘천하의 우환이 이로부터 일어날 것입니다.’라고 간하고 여러 차례 상소하여
            ‘제후들 중에는 여러 군의 토지를 많이 차지하고 있는 자가 있습니다만, 이것은 고대의 제도와 다르오니 차차 조금씩 줄여야
            합니다.’고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회남왕 유장은 고조 유방의 아들이고 이제 황제가 된 문제의 하나 남은 동생이다. 유장은 장성하여 솥을 들어 올릴 정도로
            힘이 셌으며, 문제가 즉위한 후 자신이 문제와 가장 친밀한 황족임을 들먹여 교만해지고 법을 어기는 경우가 많았다. 문제는
            그가 하나 남은 동생이라는 이유로 그를 항상 너그럽게 용서했다. 그러나 회남왕 유장은 버릇이 고쳐지지 않았고 급기야
            반란을 꾀하기까지 했다. 반란한 자는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는 여론에 차마 하나 남은 동생에게 죽음을 내릴 수 없었던 문제는
            살려주는 대신 봉국을 빼앗고 蜀(촉)으로 귀양 보냈다. 그러나 귀하게 살던 유장이 촉으로 귀양가는 도중에 잘 먹지 못해 굶어
            죽게 되자 문제는 박정하게 대한 것을 후회했다. 회남왕의 죽음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 문제는 회남왕의 세 아들을 회남왕의
            봉토를 나누어 각각 회남왕 형산왕 여강왕에 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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