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1 - 정형외과 소식지 384호-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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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어야 회복된다는 말을 듣고 육지에 나가 토끼를 잡아올 신하를 구하는데 문어가 자신이 할 수 있다고 하자 이에 수 천년

            묵은 자라 즉 별주부가 문어를 반박하고 자신이 적임자라고 말하는 가운데 ‘너는 우물 안 개고리라. 오직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도다. 子胥(자서)의 兼人之勇(겸인지용)도 劍光(검광)에 죽어있고 楚覇王(초패왕)의 氣蓋世(기개세)도 垓下城(해하성)에
            패하였나니 우직한 네 용맹이 내 지혜를 당할 쏘냐?...’ 라는 대목이 나오고 ‘특히 우직한 네 용맹이 내 지혜를 당할 쏘냐’라는
            말은 유방이 항우에 한 吾寧鬪智 不能鬪力(오녕투지 불능투력) 즉 ‘나는 지혜로 싸우지 힘으로 싸우지 않는다’는 말을
            인용하고 있고 이 말은 그 후 덩치가 작은 사람이 힘이 세 보이는 상대를 향해 사용하는 문구가 됐다.
            물론 우리가 지금도 두고 있는 將棋(장기)의 싸움이 초와 한의 싸움으로 되어있는 것만 봐도 이 초한전쟁과 그 승부가 얼마나
            동양 사상과 생활에 큰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다.


            진나라의 말기에 진승의 봉기를 시작으로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나 다시 全國(전국)이 혼란의 상태가 되었다. 진시황에                                       31

            의해 망한 6국의 후손들도 각자 왕이 되어 옛 나라를 재건하려 하였다. 초나라의 장군이었던 항량은 초나라 마지막 왕인
            懷王(회왕)의 손자를 찾아 楚懷王(초회왕)이라고 하고 초나라를 다시 세웠다. 항우는 항량의 조카로 항량이 진의 장수
            장한에게 패하여 죽은 뒤 항량의 뒤를 이어 초의 장군이 되었다. 진의 장군 장한은 반란을 일으킨 여러 군대를 막아왔으나                                     정
            뚜렷한 전과를 내지 못하자 조고의 모함을 두려워하여 항우에게 항복하였다. 항우는 키가 8척에 이르렀고 큰 솥을 들어 올릴                                    형
                                                                                                                   외
            정도로 힘이 장사였으며 검술과 전투에 능하여 각종 병장기를 잘 다루었다. 초나라의 장군이었던 항씨 가문과 초나라를 세운
                                                                                                                   과
            항량의 후광에 힘입어 많은 세력이 그를 따랐다. 여기에 진의 장한이 항우에게 항복하여 그 군세는 다른 누구보다 월등하였다.                                   학
            유방은 沛縣(패현)사람으로 장년이 되어 시험을 쳐서 亭長(정장)이 되었다. 술을 좋아하고 색을 밝혀 늘 왕온과 무부의                                      회

            술집에서 외상술을 마셨다. 그런데 유방이 매번 술을 마시는 날이면 술이 몇 배나 더 팔렸다. 그래서 연말이 오면 이 두                                     소
                                                                                                                   식
            술집은 늘 유방의 외상 장부를 찢어 버렸다. 진나라 말에 정장으로 驪山(여산)으로 죄수들을 호송하였는데 도중에 도망친
            자가 많았다. 스스로 생각해 보니 도착도 하기 전에 다 도망칠 것 같았다. 이에 밤이 되자 호송하던 죄수들을 다 풀어주며
            ‘당신들 모두 가시오. 나도 이제 도망쳐 숨을 것이오.’ 라고 했다. 죄수들 중 장사 10여 명이 그를 따르기 원하였다. 그 후
            저절로 사람들이 많이 따르게 되고 더욱이 패현의 자제들 중 많은 사람들이 따르게 되었다. 사람들이 권하여 우두머리로 삼아
            沛公(패공)이라고 하였다. 패공의 군사들은 항량과 함께 여러 전과를 얻었고 항량이 전사한 후에는 항우와 함께 진나라에
            대항하여 싸웠다. 초회왕은 항우와 유방에게 진나라 관문인 函谷關(함곡관)에 먼저 들어가는 사람을 왕으로 삼겠다고 약속을
            했다. 초회왕은 ‘항우는 사람됨이 포학하고 성미가 거칠며 간교하고 잔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예전에 그가 襄城(양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을 때 성안의 병사들과 민간인들을 씨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생매장하여 죽여버린 적이 있습니다. 그가

            지나는 지방마다 사람들이 잔인무도하게 학살당하기가 일쑤였습니다. 더욱이 초군은 수차에 걸쳐 경솔하게 진군하였기 때문에
            陳王(진왕)과 項梁(항량)이 모두 이로 말미암아 실패를 자초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관대하고 경험이 풍부하며 노련한
            사람으로 대체하여 정의를 쫓다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진격하여 진의 부형들에게 도리를 천명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진의 부형들이 그들의 군주 밑에서 시달린지 이미 오래되었기 때문에 지금 정말로 능력있고 관대한 장자가 나아가 포악한
            짓을 일삼지 않는다면 관중은 반드시 공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로지 패공만이 관대하고 충직한 장자이니 그를 파견하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하고 패공에게는 빠른 길인 서쪽으로 함곡관에 가게 하였고 항우에게는 동쪽 경로를 통해 위험에 빠진
            북쪽의 조나라를 돕게 하고 그 후 서쪽으로 진군하여 함곡관에 가도록 하였다.

            패공의 군사가 함곡관에 도달하자 진 3세 子嬰(자영)은 유방에게 항복하였고 유방은 진의 3세 자영을 위시한 모든 진의
            황족들을 사면하고 부고를 봉쇄하여 약탈을 금지하고 그동안 진의 혹독한 법에 시달린 백성들에게 모든 법령을 폐지하고
            ‘사람을 살해한 자는 사형에 처하고, 사람을 상해하거나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죗값을 받는다’는 3장의 법만 약속하여 많은
            호응을 받았다.(約法三章:약법삼장) 이 소문을 들은 항우는 매우 분노하여 유방을 공격하려 하였다. 항우는 40만의 군사가
            있었고 유방은 10만의 군사가 있어 서로 전쟁을 할 경우 유방의 열세가 분명하였다. 항우의 삼촌 항백과 장량의 주선으로
            유방은 항우에게 사죄하러 항우가 주둔하고 있는 鴻門(홍문)으로 갔다. 이에 마음이 누그러진 항우는 유방을 위해 잔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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