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1 - 정형외과 소식지 387호-5월호
P. 21
대하여 공론이 있었는데 ‘일본 나라에서 바친 바, 길들인 코끼리는 이미 聖上(성상)의 玩好(완호)하는 물건도 아니요, 또한
나라에 이익도 없습니다. 두 사람을 다쳤는데, 만약 법으로 논한다면 사람을 죽인 것은 죽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또
일 년에 먹이는 꼴은 콩이 거의 수백 석에 이르니, 청컨대 周公(주공)이 코뿔소와 코끼리를 몰아낸 옛이야기를 본받아
전라도의 海島(해도)에 두소서.’라는 병조 판서 柳廷顯(유정현)의 진언에 따라 지금의 광양만에 있는 獐島(장도)로 유배를 가게
됐다. 또 그 후 ‘길들인 코끼리를 순천부 장도에 방목하는데, 水草(수초)를 먹지 않아 날로 수척해지고, 사람을 보면 눈물을
흘립니다.’라는 전라도 관찰사의 보고에 따라 다시 육지로 내어 키우라고 하였고 1420년인 세종 2년에는 ‘코끼리란 것이 쓸
데에 유익 되는 점이 없거늘, 지금 도내 네 곳의 변방 지방관에게 명하여 돌려 가면서 먹여 기르라 하여 그리하였으나, 폐해가
적지 않고, 도내 백성들만 괴로움을 받게 되니, 청컨대, 충청·경상도까지 아울러 명하여 돌아가면서 기르도록 하게
하소서.’라고 하여 전라도에서 그 코끼리를 관리하는데 막대한 어려움을 호소하여 그 후로는 충청 전라 경상도에서 번갈아
한 달씩 키우도록 하였다. 그 후 충청도 관찰사가 보고하기를, ‘公州(공주)에 코끼리를 기르는 종이 코끼리에 채여서
죽었습니다. 그것이 나라에 유익한 것이 없고, 먹이는 꼴과 콩이 다른 짐승보다 열 곱절이나 되어, 하루에 쌀 2말, 콩 1말씩 21
이온즉, 1년에 소비되는 쌀이 48섬이며, 콩이 24섬입니다. 화를 내면 사람을 해치니,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해가
되니, 바다 섬 가운데 있는 목장에 내놓으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임금이 명령을 내려 ‘물과 풀이 좋은 곳을 가려서 이를
내어놓고, 병들어 죽지 않게 하라.’라고 하였다. 이에 그 코끼리는 다시 섬으로 추방이 되었다. 이로써 10년간 지속된 코끼리의 정
거취에 대한 논의가 일단락이 되었으나 그 후의 코끼리의 행적은 알 수가 없다. 형
외
임진왜란의 말기에 명과의 휴전협상이 결렬된 왜는 1597년 정유재란을 일으켜 남해안 일대에 왜성을 축조하고 지구전에 과
학
돌입했다. 당시 일본 수군은 이순신의 파직과 원균의 칠천량 해전 대패로 말미암아 남해안 대부분의 제해권을 장악하였고
회
일본 육군은 남원 전투, 전주성에서 조명연합군을 대파하고 남원과 전주를 함락시킨 후 전라도를 점령하고 충청도 직산까지
소
진격하여 명군과 대치하였다. 후에 직산에서 명나라군과 대치하여 몇 차례 전투하였으나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식
명량 해전에서 일본 수군을 대파하자 보급선이 끊길 것을 우려한 일본 육군은 직산을 끝으로 더는 진격하지 못했다.
1598년 풍신수길이 죽게 되자 왜군은 철수를 시작하였다. 小西行長(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은 전라도 쪽의 군사를
이끌고 후퇴하여 순천왜성에 주둔하였고 그 앞 獐島(장도)에 진을 친 명나라 진린과 이순신이 소서행장의 퇴로를 막고
있었다. 퇴로가 막힌 소서행장은 뇌물을 진린에게 주어 퇴로를 열게 해 달라고 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사천에 주둔하고 있던
島津義弘(도진의홍:시마즈 요시히로)이 함대를 이끌고 소서행장을 구하러 노량 앞바다로 오게 되고 이순신과 진린은 왜
연합군을 치러 노량으로 가게 된다. 이 전투에서 왜군에 큰 타격을 주지만 결국 이순신은 전사하고 왜군들은 간신히 퇴로를
얻어 일본으로 돌아가게 된다. 지금도 광양만이 내려다보이는 작은 언덕 위에 순천왜성이 남아있고 그 바로 앞에는 이순신
장군이 진을 쳐 소서행장의 퇴로를 막았던 장도가 있다. 비록 지금은 광양만 매립으로 육지가 됐지만 이 장도가 600여 년 전
우리나라에 온 불쌍한 코끼리가 귀양살이를 했던 곳이다.
조선 초기 비교적 국력이 안정적이던 태종과 세종 연간에 조선에서 코끼리 한 마리를 유지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웠다. 너무
큰 코끼리를 관리하기도 어려웠고 자칫하면 사람을 다치게 하였고 또 사육에 많은 곡물이 필요한 것에 사람들이 먹을 것도
부족한데 소용도 없는 코끼리를 키워야 하는지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았다.
1959년 스텐리 토플 선교사는 애양원에 정형외과의사로 부임했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인 윌슨은 그동안 방치되어 유랑하던
한센병 환자들의 치료와 선교를 위해 1909년 우리나라의 첫 나병 전문병원인 애양원을 설립했다. 애양원에서 윌슨선교사는
한센병 환자들의 치료와 복지를 위해 많은 애를 썼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1942년 외국인 추방령을 내려
우리나라에 와 있던 모든 미국 선교사들도 본국으로 추방되었고 그로 인해 애양원은 윌슨의 후임을 구하지 못해 환자들은
방치된 상태가 되었다. 그 후 해방과 한국동란의 와중에서 우리나라의 모든 상황이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고 애양원도
경제적으로 또 의료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미국교회에서는 한국동란으로 피폐해진 한국을 돕자는 캠페인이 있었고
이를 통해 한센병 환자들을 치료하는 기관인 애양원의 어려움을 알게 된 29살의 토플은 전남 여수의 애양원에 오게 됐다. 그가
한국에 왔을 때에는 한국에는 한센병 환자와 수많은 소아마비후유증 환자들이 있었고 그는 그들을 체계적으로 수술하기
위해 애를 썼다. 난방도 되지 않고 병원 실내에 수도시설도 없는 애양원에서 고생을 한다는 소식이 미국교회에 알려지자 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