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4 - 정형외과 소식지 390호-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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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고전산책(東洋古典散策)
김인권 (한국 한센복지협회 회장)
(서울 예스병원 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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桃李成蹊 (도리성혜: 과실나무아래 길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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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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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趙簡子 鞅(조간자 앙)이 陽虎(양호)에게 물었다. ‘그대는 인재를 육성하는데 남다른 재주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식 어쩌다가 몸을 피하여 우리나라에까지 오게 되었습니까?’ ‘노나라에 있을 때 저는 세 사람의 인재를 키웠습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장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노나라에서 반역 죄인으로 몰리게 되자 세 사람 모두 나를 잡으려고
뒤쫓았습니다. 제나라에 있을 때도 저는 세 사람을 추천하였습니다. 그중 한사람은 왕의 측근이 되었고, 또 한사람은
현령, 그리고 나머지 한사람은 빈객을 접대하는 관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다시 죄인으로 모함을 받자 왕의 측근이 된
자는 나를 만나려 하지 않았고, 현령이 된 자는 나를 체포하려 하였고, 빈객을 접대하는 관리는 나를 뒤쫓아 왔습니다. 그러니
내가 인재를 육성하는 재주가 있다는 말은 합당치 못합니다.’ 조간자가 고개 숙여 웃으면서 말하였다. ‘오로지 어진 사람만이
은혜를 갚을 줄 알고 어질지 못한 사람은 은혜를 갚을 줄 모릅니다. 복숭아나무와 자두나무를 심으면 여름에 그 나무 아래
그늘에 쉴 수 있고 가을에는 열매를 먹을 수 있는데 남가새(蒺藜;질려)를 심으면 여름에는 쉴 수 없고 가을에는 가시에 찔리게
됩니다. 지금 그대가 얻은 것은 남가새입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사람을 천거하는데 신중을 기하는 것입니다.’ 훌륭한 인재를
천거하는 것을 복숭아나무와 자두나무라고 세간에 전해지는 말은 모두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유향 설원, 한비자 외저설
좌하)
孔子(공자)가 노나라에 있을 때 양호가 노나라의 실권을 잡고 있었다. 그는 논어에 양화(陽貨)로 나오며 논어 양화편 제1장에
공자와 양호의 만남이 기록되어 있다. 노나라의 권신인 계손씨의 수장 季桓子(계환자)의 家臣(가신)인 양호는 신분은 비록
계손가의 가신이지만 노나라에서 계환자보다 더 나가서 노나라 군주인 魯定公(노정공)보다 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양화가 공자를 만나려 하였으나 공자가 만나주지 않자 공자께 돼지를 선물로 보냈다. 공자는 선물을 받고 그 답례를 해야
했으나 양화를 직접 만나기를 꺼려 양화가 없을 때를 틈타 사례하러 갔는데 길에서 그를 마주치고 말았다. 양화가 공자에게
말했다. ‘오시오. 내 당신과 할 말이 있소. 보배로운 것을 품고 있으면서도 나라를 혼미하게 내버려 둔다면 어질다 할 수
있겠소? 할 수 없을 것이오. 일에 종사하고 싶어 하면서도 번번이 기회를 놓친다면 지혜롭다 할 수 있겠소? 할 수 없을
것이오. 해와 달은 가고 세월은 나를 기다려 주지 않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알겠습니다. 나도 장차 벼슬자리에 나갈
겁니다.’ 공자는 양호의 군사, 정치력이 필요했고, 양호는 공자의 인망, 학식이 필요했던 상황에서 그 둘이 연합하지 않았던
것은 공자가 그를 매우 싫어했기 때문이다. 공자는 외모도 양호와 닮았다. 공자가 양호가 권력을 쥐고 있는 노나라를 떠나
주유할 때 陳(진)나라로 가려고 광 땅을 지나게 되었다. 그때 그곳 사람들이 노나라의 양호가 온 줄로 알고 몰려가서 공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