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6 - 정형외과 소식지 390호-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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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내가 이 장군을 만난 적이 있는데, 성실하고 근엄하고 온후하여 마치 시골사람 같았고 별로 입을
여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그가 죽었을 때 그를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모두 그를 위해 애도하고 눈물을 흘렸다. 바로
그의 충실한 마음이 사대부에게 신망을 얻었기 때문이다. 속담에 이르기를 복숭아나무나 자두나무는 말하지 않더라도 그
밑에는 절로 길이 생긴다고 했다. (桃李不言 下自成蹊 :도리불언 하자성혜). 이 말은 비록 간략한 것이지만, 그의 큰 덕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후로 도리성혜는 인품이 있고 그 인품에 따라 사람들이 모이게 되고 또 그 모인 사람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바를 얻게 해주는 사람을 뜻하게 된다.
사마천이 극찬한 이장군은 李廣(이광)을 말한다. 이광은 한나라 문제 경제를 거쳐 무제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흉노와
싸워 많은 군공을 올린 장군이다. 무제는 흉노를 정벌하기 위해 대장군 위청에게 대 군단을 이끌게 했다. 이때 이광은
자신도 나가서 싸우고 싶다고 계속 청했으나, 한 무제는 이광이 나이가 많다고 출전을 말리다가 나중이 돼서야 간신히
그를 前將軍(전장군)으로 임명하여, 위청의 지휘 하에 싸우게 했다. 그러나 소통의 착오로 우회하느라 길을 잃어 늦게 본부군에
26 합류하게 되었고 어렵사리 본부군에 합류하였을 때는 싸움은 끝나 있었다. 위청은 승리를 거두기는 했으나 가장 중요한
흉노의 선우를 놓쳐버렸고 이는 이광의 군대가 늦게 도착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늦게 본부군에 합류하게 된
이유에 대하여 위청은 長史(장사)를 불러 이광을 질책했다. 이광은 그때서야 이렇게 대답했다. ‘여러 교위들은 죄가 없다. 내
정
형 스스로가 길을 잃은 것이다. 내가 직접 심문을 받도록 하겠다.’ 그리고 부하들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나 이광, 머리를
외 틀어 올리고 흉노와 크고 작게 싸우기를 70여회, 이제 다행히도 대장군의 명을 따라서 출격하여, 선우의 군대를 막으려
과 했으나, 대장군은 이 이광을 멀리 돌아가게 했고, 또 군대는 길을 잃기까지 하였다. 이는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이광의
학 나이가 이미 예순을 넘었으니, 이제와서 어찌 刀筆吏(도필리:형정을 맡은 관리) 따위나 상대할 것인가!’ 그러고는 말을 마치자
회
소 칼을 뽑아 자신의 목을 베어서 자결을 해버렸다. 이광의 군대와 사대부들은 비통하여 눈물을 흘렸고, 울음소리에 온 군영이
식 들썩거렸다. 이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나이가 적든 많든, 그를 알든 모르든 간에 모두들 이광을 위해 눈물을 흘렸다.(사기
이장군전)
桃李(도리:복숭아와 자두나무)는 성격이 너그럽고 포용력이 있는 훌륭한 인품의 인재를 말한다. 桃李成蹊(도리성혜)란 桃李不言
下自成蹊(도리불언 하자성혜)의 줄인 말로 복숭아나무와 자두나무는 나무가 넉넉하여 그늘을 제공하고 또 맛있는 열매를
맺어 그 나무 아래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그 나무 아래에 저절로 길이 생긴다는 말로 다시 말하면 성격이 너그럽고
포용력이 있는 훌륭한 인품의 인재에게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 다는 말이다. 桃李(도리)는 인재를 천거하거나 임용하는 일을
일컫기도 하며 뜻이 확대되어 師弟之間(사제지간)을 뜻하기도 한다.
최근 돌아가신 김익동 선생님을 생각하면 桃李成蹊(도리성혜)란 이런 분을 두고 말하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선생님은
경북대의대 정형외과 교수였으며 총장을 역임하였고 정형외과학회 회장과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학회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경북대로 옮기기 전에 동산병원에 봉직하였는데 이때 한센환자들의 병원인 애락원에 관여하였고 그 후부터
한센환자와 한센환자의 변형된 수부 재건에 관심을 가지고 많은 수술로 그들의 갈고리손 변형을 치료하였다. 한센환자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여수애양원의 토플선교사와 교류하였고 그것을 계기로 1979년부터 2021년까지 애양원의 이사와
이사장으로 헌신하였다. 필자는 1978년 애양원에 관심을 가지고 드나들 때부터 김익동 선생님을 만나 알게 되었으며 그
후 1983년 이 병원에 취직하여 일할 때부터 많은 격려와 조언을 해 주셨다. 필자가 애양원에 36년 동안 봉직하며 나름대로
뜻을 가지고 일할 수 있었던 것은 한결같이 믿고 후원해 주신 선생님 덕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김익동 선생님은 각박한
이 세상에 그를 중심으로 저절로 길이나 사람들이 모이게 하는 어른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걱정거리를 가지고 상의 드릴
선생님이 계시지 않는 것이 허전하고 섭섭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