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0 - 정형외과 소식지 393호-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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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고전산책(東洋古典散策)




                                                                                김인권 (한국 한센복지협회 회장)
                                                                                         (서울 예스병원 병원장)









    20          絶纓之宴(절영지연: 이제 다 갓끈을 자르고 즐기자)




    정
    형
    외          周(주)나라 초기에 楚(초)나라는 양자강 중류의 荊州(형주)를 근거로 세워진 나라다.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은 황하중류의 함양과
    과          낙양을 중심한 지역을 中原(중원)이라고 하였으며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荊楚(형초) 지역을 南蠻(남만:남쪽의 미개인)이라고
    학
    회          하여 멸시하였다. 초의 선조는 고대의 5帝(제)중 하나인 顓頊(전욱)이며 그중 季連(계련)의 후손이다. 주 성왕은 문왕과 무왕을
    소          위해 애를 썼던 공신들의 후손들을 추천하여 그중 熊繹(웅역)을 楚蠻(초만)지방에 봉하고 子男(자남)이라는 전답을 주었다.
    식          그에게 羋(미)라는 성을 내리고 丹陽(단양)에 살게 했다.
               초의 子爵(자작)이 된 웅역은 魯公(노공) 백금, 衛(위)나라 강숙의 아들 牟(모), 晉侯(진후) 섭, 齊(제)나라 태공의 아들 여급과
               같이 성왕을 섬겼으나 나라가 중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다른 제후보다 낮은 자작의 신분이었으므로 계속 중원의 여러
               나라들로부터 대우를 받지 못했다. 그 후 熊渠(웅거)는 아들 셋을 낳았다. 주나라 夷王(이왕) 때 왕실이 미약해지자 제후들이
               조회를 드리러 오지 않고 서로 싸웠다. 웅거는 長江(장강)과 漢水(한수) 일대 백성들의 추대를 얻어 병사를 일으켜 庸(용)과
               楊粵(양월)을 공격하여 鄂(악)에까지 이르렀다. 웅거는 ‘나는 야만족이니 중원의 국호와 시호를 같이 쓰지 않겠다.’고 하며
               맏아들 康(강)을 句亶王(구단왕)에, 가운데 아들 紅(홍)을 鄂王(악왕)에, 막내아들 執疵(집자)를 越章王(월장왕)에 봉했는데
               모두가 강변의 초만 땅에 살았다. 그 후 주나라 厲王(여왕)이 포악하게 굴자 웅거는 여왕이 초나라를 정벌할까 두려워 자신들이
               스스로 붙인 왕호를 없앴다.
               熊通(웅통)이 조카를 죽이고 군위에 올랐다. 웅통 35년에 초나라가 隨(수)나라를 정벌했다. 수나라가 ‘우리에게는 죄가
               없습니다.’라고 했다. 초왕은 ‘나는 만이의 땅에 거주하고 있다. 지금 제후들이 주나라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서로를
               침략하거나 죽이고 있다. 내가 가진 군사로 중국의 여러 나라의 어지러운 정치에 간여하여 안정시키려 하니 왕실에다 내
               작호를 높여달라고 요청할 것이다.’라고 했다. 수나라 사람들이 그 때문에 주나라로 가서 초나라를 다른 제후들보다 작위를
               높여 줄 것을 청했으나 왕실은 듣지 않았다. 돌아와 이런 사실을 초나라에 보고했다. 37년에 초나라의 웅통은 화가 나서 ‘우리
               선조 죽웅은 문왕의 스승으로 일찍 돌아가셨고, 성왕은 내 선조를 추천하여 작위와 땅을 주어 초나라에 살게 하니 만인이
               모두 복종했다. 그러니 주왕이 작위를 더해 주지 않으면 내 스스로 높일 것이다.’라 하고는 스스로 武王(무왕)이 되어 수나라와
               동맹을 맺고 돌아갔다.
               이때부터 초나라의 군주들은 스스로 왕이라고 칭하며 중원의 여러 나라들과 교류를 끊고 주위의 약소국가들을 정벌 합병하여
               중원의 여러 나라들이 무시할 수 없는 강국이 되었다.
               商臣(상신)이 태자인 자신을 폐하고 동생을 세우려 하는 아버지 成王(성왕)을 죽이고 穆王(목왕)이 되었다. 목왕이 12년 만에
               죽고 아들 熊侶(웅려)가 뒤를 이으니 莊王(장왕)이다. 초장왕은 춘추 5패 중 제환공, 진문공에 이어 세 번째 패자가 되어
               미약해진 주나라를 대신하여 여러 제후국들의 분쟁을 해결하고 질서를 잡는 역할을 하였다.
               초장왕은 즉위한 후 3년이 지났으나 신하들에게 한 번도 왕으로써 명령을 내린 일이 없었다. 그가 궁성 밖으로 나가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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