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8 - 정형외과 소식지 389호-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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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록이란 곳에 당도했다. 농부들은 논둑에 늘어앉아 점심밥을 먹느라고 한창이었다. 중이가 호언을 돌아보며 말한다. ‘저
농부들에게 가서 밥을 좀 달라고 청해 보구려’ ‘우리는 진나라 사람입니다. 송아지가 이끄는 저 수레 위에 타신 분이 바로
우리 주인이십니다. 갈 길은 먼데 양식이 없으니 원컨대 요기를 좀 시켜주십시오’ 농부가 껄껄 웃으면서 대답한다. ‘당당한
사내대장부들이 제 손으로 벌어먹을 생각은 않고 그래 밥을 얻어먹으러 다니오? 우리는 농사짓는 사람이라 배불리 먹고
저 논밭을 갈아야 하니 남에게까지 줄 밥이 어디 있겠소?’ ‘우리는 안 먹어도 좋습니다. 주인이 매우 시장하시니 그럼 한
그릇만 동정해 주십시오.’ 농부들이 한바탕 웃고 나서 저희들끼리 쑥덕거린다. 그러더니 한 농부가 그릇에다 흙을 가득 퍼서
내주었다. 위주가 더 참을 수가 없어 고리눈을 부릅뜨고 촌 농부 놈들이 어찌 이다지도 우리를 모욕하느냐 하고 그릇을 뺏어
집어던졌다. 중이도 크게 노하여 저놈들을 엎어놓고 볼기를 쳐야겠다 하고 매를 뽑아들려고 했다. 호언이 급히 말리며 ‘밥을
얻기는 쉬워도 흙을 얻기는 어렵습니다. 토지는 바로 국가의 근본입니다. 하늘이 농부의 손을 빌려 공자께 흙을 주시니
이는 장차 나라를 얻을 징조입니다. 공자는 수레에서 내려 저 농부에게 절하시고 다시 흙 한 그릇을 청하십시오.’ 중이
28 일행은 10리쯤 갔을 때였다. 그들은 배가 고파서 더 걸을 수가 없어 나무 밑에서 쉬기로 했다. 신하들은 다투다시피 고사리를
캐서 쪄 먹었다. 중이는 암만 먹으려 해도 고사리만으론 목구멍에 잘 넘어가질 않았다. 이때 介子推(개자추)가 어디서
생겼는지 고깃국 한 그릇을 중이에게 바쳤다. 참으로 맛이 좋았다. 중이는 단숨에 그 고깃국을 맛있게 먹고 묻는다. ‘어디서
정
형 고기가 생겼소?’ 개자추가 웃으며 대답한다. ‘그것은 신의 허벅다리 살입니다. 신이 듣건대 효자는 제 몸을 죽여서까지 부모를
외 섬기고 충신은 제 몸을 죽여서까지 임금을 섬긴다고 합니다. 이제 공자께서 너무나 시장하신 터이기에 신이 허벅다리 살점을
과 도려내어 국을 끓였습니다.’ 중이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도망 다니는 사람이 그대에게 너무나 폐를 끼치는구나
학 장차 무엇으로 그대에게 이 은혜를 갚을까?’ 개자추는 그저 웃으며 ‘신은 공자께서 귀국하실 날이 하루속히 오기를 비는
회
소 마음뿐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공자의 股肱之臣(고굉지신:팔 다리와 같이 중요한 신하)이 될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외에
식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그 뒤 중이 일행은 굶으며 걸식을 하며 쉬지 않고 걸어서 제나라에 당도했다. 제환공은 중이의 어진
명성을 전부터 익히 듣고 있었다. 제환공은 중이 일행이 자기 나라 관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자 즉시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영접했다. 제환공의 환대에 중이 일행은 아무런 부족도 느끼지 않고 제나라에서 살게 되었다. 제나라에서 편안한 나날을 지낸
지 6년이 지났다. 중이는 진나라로 돌아가 나라를 찾을 생각을 잊고 제나라에서의 편안한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이에 그를
따라온 신하들은 중이를 술을 먹게 하여 정신을 잃게 한 뒤 마차에 싣고 제나라를 떠났다. 한참 길을 떠난 후에야 술에서
깬 중이는 화가 나서 주모자인 호언을 창으로 찌르려고 하였다. 이에 조쇠가 ‘저희들이 공자의 큰 뜻을 받들고자 부모 형제
처자까지 버리고 고국을 떠나 만리타국으로 돌아다니면서도 서로 버리지 않고 붙어 다니는 것은 공명을 죽백에 길이 남기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晉侯(진후)가 무도하니 진나라 백성이면 그 누가 공자를 군위에 모시고자 아니 하겠습니까? 공자께서 친히
본국에 돌아가 대업을 계승하고자 노력하지 않으신다면 그 누가 제나라까지 공자를 모시러 오겠습니까? 오늘 일은 다 저희가
공론하고 한 것입니다. 호언 한 사람만 꾸짖지 마십시오.’ 이에 제나라를 떠난 중이 일행은 曹(조) 宋(송) 鄭(정) 楚(초)나라를
거치는 동안 더러는 냉대를 받고 또 더러는 환대를 받으며 秦(진)나라의 穆公(목공)의 도움으로 드디어 19년의 유랑 생활을
마치고 62세에 진나라에 돌아와 진문공이 되었다.
진문공은 나라를 다시 찾게 된 데 대하여 논공행상을 하려고 모든 신하들을 궁으로 불렀다. 그리고 신하들의
공로를 1·2·3등급으로 나눴다. 그 규정에 의하면 함께 망명하여 열국을 방랑했던 신하들이 1등 공신이었다. 그다음은 국내에
있으면서 공자 중이를 귀국할 수 있도록 힘써준 신하들이 2등 공신이 되었고 그다음은 그가 귀국했을 때 즉시 항복하고
영접한 신하들이 3등 공신이 되었다. 이리하여 나라에서 땅을 받지 못한 자에겐 땅을 하사하고 이미 땅을 받은 적이 있는
자에겐 더 많은 땅을 봉했다. 그리고 진문공은 성에다 조서를 내 걸게 했다. ‘만일 공로가 있는 자로서 이번에 상을 받지
못한 자가 있거든 자진해서 신고하라’ 이때 논공행상에서 빠진 사람으론 개자추가 있었다. 그는 원래 청렴결백하기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는 공을 다투는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궁정에 서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개자추는
귀국한 뒤 반열에 끼어 서서 한번 진문공에게 조하를 드린 뒤로 병들었다고 핑계하고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그는 손수
신을 짜서 단 한 분인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며 생계를 꾸렸다. 진문공은 모든 신하들을 불러들여 대회를 열고 논공행상을
하던 날 개자추가 참석하지 않았건만 총망중에 그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진문공은 우연히 그를 잊어버린 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