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 - 정형외과 소식지 394호-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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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하기가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하의 각계인사들은 귀를 기울여 듣기만 하고 두려워 벌벌 떨며 입을 굳게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세 군주들이 정도를 잃어도 충신은 감히 간언하지 못하였고 智士(지사)는 감히 계책을 제안하지
            못하였으며 전국에 큰 변란이 일어난 후에도 황제가 들을 수 없었으니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고 또
            가혹한 형벌과 법률로는 인민들의 반항을 저지할 수 없으며, 방비가 철저한 금성철벽도 통치자의 정권이 전복되지 않도록
            보호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진왕조가 아무리 강대하다 하더라도 잔인하고 포악하여 민심을 잃는다면

            필연적으로 전복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왕조의 안정과 위기의 기반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옛말에 ‘과거의 경험과 교훈을 잊지
            않는 것은 다가올 미래의 거울로 삼기 위해서이다.’라고 했다. 이 때문에 군주는 나라를 다스릴 때, 옛 과거의 역사적 궤적을

            돌아보고 현실을 살피고 백성의 마음과 사물의 이치를 참고하는 법이다. 또한 나라가 흥하고 망하고 융성하고 쇠약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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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칙을 살펴, 때에 맞는 정책과 계책을 세우고, 먼저 할 일과 나중에 할 일의 순서에 따라 국가의 사업을 가려 선택하고, 시대와
            세상의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만 오래도록 나라와 백성을 지키고 안정시킬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여
            진나라의 과오를 거울삼아 한나라의 귀감을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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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野諺曰「前事之不忘, 後事之師也」。是以君子為國, 觀之上古, 驗之當世, 參以人事, 察盛衰之理, 審權勢之宜, 去就有序,                                        형

            變化有時, 故曠日長久而社稷安矣。(사기 진시황본기, 가의 과진론)                                                                    외
                                                                                                                   과

                                                                                                                   학
            賈生(가생)은 이름이 誼(의)고 낙양사람이다. 18세 때 시를 외고 글을 짓는데 능숙하여 온 고을 안에 유명했다. 그러한 소문과                                회

            여러 사람들의 천거로 한문제는 가의를 불러 박사를 삼았다. 그때 가의의 나이 20세로 박사들 가운데 가장 어렸다. 그때 천자가                                 소
                                                                                                                   식
            내리는 조칙 명령 등의 議案(의안)에 대한 자문이 있을 때에는 여러 노 선배들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가의가 대답하곤 하였는데
            그것은 사람마다 그렇게 했으면 하고 원하는 바 있어도 말로 잘 표현하지 못한 의견이었기 때문에 여러 선생들은 도저히
            가의를 따를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한문제는 기뻐하여 차례를 뛰어넘어 가의를 승진시키니 가의는 일 년 안에 태중대부에
            이르렀다. 가의는 한나라가 일어나서부터 문제에 이르기까지 20여 년을 경과하고 천하는 평화스럽게 다스려져 백성들이

            화합하여 있으므로 당연히 曆書(역서)를 고치고 관복의 색깔을 바꾸며 制度(제도)를 바르게 하고 관명을 정하고 예악을
            흥성케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 것들에 대한 의례와 법도의 초안을 기안했는데 문제는 감연히 이 모든
            법령을 개정하고 열후로 하여금 수도인 장안에 거하지 말고 다 각자의 영지로 돌아가게 했다. 이리하여 문제는 여러 신하들과

            의론하여 가의를 公卿(공경)의 지위에 올릴만하다고 했다. 그런데 주발, 관영 장상여풍경 등 원로대신들이 모두 가의를
            싫어하여 ‘저 낙양의 사나이는 나이도 어리고 학문을 한 것도 얼마 되지 않으면서 멋대로 권력을 휘두르며 모든 일을 문란하게
            만든다.’라고 비방했다. 이에 천자도 후에는 가의를 멀리하여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게 됐다. 그 후 4년여에 다시 소환되어
            문제를 뵈었다. 그리고 문제는 가의와 밤이 늦도록 담론을 했다. ‘나는 오랫동안 가의를 만나지 못하였다. 내 자신 가의보다
            낫다고 생각했더니 이제 만나고 보니 나는 가의에 미치지 못하겠다.’라고 했다. 그 후 얼마 아니 되어 가의를 양회왕의 태부로

            임명했다. 양회왕은 문제의 막내아들로 문제의 총애를 받는 데다가 글 읽기를 좋아했다. 그런 까닭에 가의를 그의 태부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그 후 양회왕이 말을 타다 떨어져 죽으니 애통해하다 33살로 죽었다. 그는 請封建子弟疏(청봉건자제소)에서
            중앙집권을 위해 제후왕의 세력을 통제해야 한다는 요지를 담았는데 결국 경제 때 제후국이 오초칠국의 난을 일으키자 가의의

            상소문은 선견지명의 걸작으로 여겨지게 되었고 결국 무제 때 중앙집권을 이루는데 큰 힘이 되었다.

            가의가 인용한 전복후계는 훨씬 전부터 전해오는 교훈적 속담으로 전국시대 魏 文侯(위 문후)로부터 나온다. 위 문후가
            대부들과 함께 술을 마실 적에 公孫不仁(공손불인)을 시켜 술 마시는 규정을 만들게 하고서 말하였다. ‘술잔의 술을 다 마시지
            않는 사람에게는 큰 술잔으로 벌주를 주겠다.’ 그러나 문후가 술을 마시면서 술잔의 술을 다 마시지 않자, 공손불인이 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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